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나? 정서순화 & 훈훈한 이야기들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나?

애초에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계모를 폐비한 것은 연산군이나 세조 수양대군이 한 짓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강홍립 사건이라던가 실리외교론은 나중에 논하더라도, 과연 광해군의 행적이 그렇게 잘못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홍립 사건이나 실리외교론 같은 경우, 중국에 사대하지 않았다 하여 그게 큰 죄악은 아니다. 설령 우리나라가 미국의 이익에 위배되는 짓을 했다(간 살아남기가 힘들겠지만)고 해서 그것이 뭐 반인륜적인 행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해군의 패륜 중 대표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사항들이라면 인목대비를 쫓아낸 사건과,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을 죽인 것 등... 이 지적된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에게 잔인한 것은 모든 권력자의 공통된 속성이다. 이것을 광해군이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라서 행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린 이복동생 둘과 처남을 죽이고, 방심한 어떤 개혁정치가를 도륙냈으며, 계모의 묘를 파헤쳤다.
 
세조 수양대군은 어떤가?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 8,9백명을 사형시키고 그들 집안의 여자들을 공신들의 첩과 성노리개로 나눠주었으며, 장남인 의경세자가 가위눌림으로 죽자 형수의 귀신이 장남을 죽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형수인 현덕왕후의 관을 부관참시해버렸다.
 
권남 같은 사람은 잔머리를 써서 사촌형제의 딸을 자신이 차지하는 식으로 욕을 모면하게 했다. 권남의 사촌형제의 딸이 김문기의 며느리다.
 
태종 이방원이 어린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계모의 묘를 파헤친 것이나 세조 수양대군이 형수의 무덤을 파서 관을 박살낸 짓에 비교하면 광해군이 무슨 큰 죄를 지었겠나?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지휘하여 혼란을 수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왕조실록을 보면 광해군의 분조 지휘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드물다.
 
광해군이 성군은 아니지만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 수양대군, 연산군 등이 한 짓거리들을 생각한다면 유독 광해군에게만 부도덕하다고 돌을 던질 일도 아니다 라고 생각된다.
 
신경희의 옥사 때 능창군, 능양군의 친동생이자 삼촌 신성군의 양자로 간 그 사람을 추대하겠다는 이유로 모의하다가 처형된 사람들이 인조반정 공신들의 가족, 친척들이 아니던가?
 
신경진 일가, 구사맹 일가 등등... 신경희의 옥사 로 죽은 가족, 친지들에 대한 원한 때문에 일어선게 무슨 반정이란 말인가?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은게 죄악인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 등의 주도로 파병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인조반정의 구실이 오히려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조반정은 처음부터 명분없는 거사이자 오합지졸들의 개인적 한풀이성 반란이었을 뿐이다.
 
 

덧글

  • ㅋㅋㅋ 2011/07/03 22:46 # 삭제 답글

    올리신 글의 논지에 적극 동감입니다.^^
    이글루스 식민빠들은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인조나 선조같은 희대의 얼치기 암군, 덤앤더머를 성군이라고 찬양하는 얼빠진 애들도 있던데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 백범 2011/07/03 22:51 #

    선조 가 성군이라니, 웃음도 안나오는 얘기입니다. 왕권강화를 빌미로 당쟁의 원인이나 만들고, 이순신이나 김덕령 같은 인물들을 시기, 모함이나 한게 무슨...

    그러니 이순신이 자살을 가장하여 은신했다는 설 or 이순신 자살설(고의로 갑옷착용하지 않고) 이라던가, 곽재우의 처세술이 나름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 선조를 성군이라니... 아이고...
  • Jes 2011/07/03 23:13 #

    누가 선조를 성군이라고 했는지 링크나 좀.

    광해군이 까이는 것은 폐모 살제보다는 무책임한 정국 운영과 재정 운용 때문이지.
  • 계급 2011/07/04 01:54 # 삭제

    누가 선조를 성군이라고 했는지 링크나 좀.(2)
  • 마뷁 2011/07/04 13:12 # 삭제

    누가 선조를 성군이라고 했는지 링크나 좀.(3)
  • 2011/07/03 22: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조환 템플라 2011/07/04 12:22 # 답글

    하긴 그 후임인 인조 임금의 행적을 보면 이상하게 가정적(?)입니다. 형조에서 올라오는 일도 요즘 세태에서 말하는 '강력범죄'라고 할 만한 일도 이상하게 가정이란 테두리 내에서 해결하게 내버려 두더군요. 광해군은 조일전쟁을 겪으면서 전쟁 통에 조선 조의 막장까지 다 가 봤기 때문에 개혁하고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경향이 강했지요. 하지만 그 때에도 사대부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광해군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양반 사대부 라는 사람들은 도포 자락 휘날리는 내시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역사는 중국에 대해 북면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대려고 합니다. 결국 국가와 민족 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결과를 원했다면

    "백지로의 회귀"

    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백범 2011/07/04 12:53 #

    이율곡과 성혼선생의 위패를 성균관 문묘에 모시느냐, 마느냐 를 놓고 70년 가까이(1623~1694) 싸웠다는게 이해가 안됩니다.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존경하면 그만이지, 그게 민생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것으로 70년을 싸워야 했는지, 예송논쟁이나 장희빈vs인현왕후의 싸움 에 가서는 할말을 잃는군요. 전후 복구에 그렇게 매달렸다면 이해나 가지...

    정작 필요한 군역제 폐단이나 대동법 시행 같은 문제는 백년 넘게 질질끌면서, 저런 문묘종사 문제하고 예송이나 여자들 싸움이 그렇게도 시급한 현안이었는지...
  • 조환 템플라 2011/07/04 14:13 #

    그 당시에는 그게 이데올로기(?) 였습니다. 소중화를 자처한 지극히 바보같은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청나라 조정도 조선인들은 자기 조정 관료제 안에서 큰일을 못 하게 만들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1/07/04 13: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백범 2011/07/04 20:31 #

    유교 탈레반... 하하하하하

    오랜만에 크게 한번 웃었습니다. 정곡을 찌르셨네요. 유교 탈레반이라, 유교 탈레반...
  • 2011/07/04 16:23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학생 2011/07/04 20:27 # 삭제 답글

    학교에선 폭군이라 배워씀
  • 백범 2011/07/04 20:29 #

    학교 교육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지요.

    아직 가치관이 형성 안된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진실을 가르칠 수도 있는바...
  • 똘레랑스 2011/07/14 04:22 # 삭제 답글

    제가 볼때,조선시대의 왕실 문제는 명나라,청나라 사정과 겹쳐서 보면 좀더 명쾌하게 이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한국내 논의를 보면 임진왜란,정유재란에 비해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상당히 축소해서 다뤄지는
    것이 이상합니다.

    조선시대 당시 최강국가였던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정권이 교체되었기에,조선의 정치인들이었던 양반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송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44년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되고, 그후 청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그런데,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사촌인 홍광제가 남명정권을 1644년 세웠습니다.

    그리고,1649년에 남명정권은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정성공과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광둥성으로부터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를 하여 통치하였습니다.
    그때, 효종은 북벌을 내세우면서 서인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대가 남부지방을 토벌을 하면서 1659년 운남지방까지 장악하자,남명정권의 영력제는 버마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이즈음,효종이 죽으면서 1차 예송논쟁이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청나라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왕에 의해서 청나라군에 사로 잡힌 영명왕을 살해되였고, 이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그후 삼번(운남귀주,광동,복건)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던 강희제와 충돌하게되었습니다.
    1673년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인 오삼계가 운남,귀주지방을 중심으로
    광동의 상지신,복건의 경정충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세 명 모두 한족 출신이기에 명분으로는 명나라 복위를 내세웠습니다.
    또한,정성공의 아들로 대만을 점렴하던 정경은 복건의 경정충의 제안으로 삼번의 난에 협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삼번의 중심세력인 오삼계의 군대가 청나라 군대에 밀리기 시작하자 경정충은 재빨리 청나라 조정에 항복했으며,
    자신이 청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정경의 대만군을 공격하게 됩니다.

    때마침,1674년에 효종비인 인선왕후 사망가 사망하면서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후,1678년 오삼계가 죽고,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1681년 죽게 되면서 삼번의 난은 끝납니다.

    1680년 서인 김석주와 김익훈 등이 남인 허견과 왕족 복선군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숙종에 고하여 남인 세력을 제거한 사건인
    경신환국이 발생합니다.
    그리고,1681년 계비 민씨가 왕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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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1688년 장희빈은 숙종의 장남‘윤'을 낳았습니다. 이 왕자가 후에 경종에 오르게 됩니다.
    숙종이 아들 '윤'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의 반대를 받습니다.
    하지만,숙종은 서인 영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면서,기사환국(1689년)이 발생합니다.

    제가 볼때,이시기에 주변 정세를 살펴보아야 이 사건을 이해가 될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신강지역을 준가르 부족의 수령 갈단이 1680년경 장악했습니다.
    1687년 동몽골 세력의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동몽골에서는 좌익(=서부)의 자삭투 칸(Jasaghtu Khan)과 우익(=동부)의 투시예투 칸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갈단의 동생이 이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갈단은 복수를 명분으로 1687~1688년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했고, 궁지에 몰린 투시예투 칸, 불교 교단의 수장으로 일종의
    ‘몽골의 달라이 라마’ 격이었던 젭춘담바(Jebchundamba) 등 동몽골의 귀족들은 대거 남하하여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강희제는 먼저 갈단이 러시아와 연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맺어 러시아를 중립시켜 놓은 다음,
    갈단을 치기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섰습니다.

    강희제는 1690년부터 1697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서 친정을 감행했으니,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사이에 서인이 폐비민씨의 복귀운동을 주도한 갑술환국(1694년)이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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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명나라의 베이징 정권이 멸망했음에도,소중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면,명분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율곡 '이이' 위패를 성균관에 모시냐는 문제를 인조반정(1623년)이후 갑술환국(1694년)까지 진행했을까요?

    서인은 현실론을 내세우고,동인은 자주론을 내세우는 북인 과 군주론을 내세우는 남인으로 나누어집니다.
    명분을 내세우는 주둥이가 아니라,행동으로 보여지는 몸뚱이를 보면 실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나열한 사실들을 참고하여,각 정당들의 행위를 분석해보겠습니다.

    1.서인 : 현실론을 내세우면서 당시 중국을 장악했던 청나라를 지지하고 있습니다.(율곡학파)

    2.북인 : 당시 중국을 청나라가 장악하고 있으나,남부지방에서는 남명정권이 한때 존재했었고,대만의 정성공이나 운남지방의
    오삼계와 같이 한족 출신으로 청나라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지지하며 자주론을 내세웁니다.(남명학파)

    3.남인 :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가 준가르 원정을 나가기 위해,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자,조선왕실의 군주론을 내세웁니다.(퇴계학파)

    이것을 바탕으로 '율곡의 위패' 논쟁을 제가 해석하면,임진왜란 때 별로 한 것 없는 서인들이 국제정세의 전환으로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이것을 '인조반정(1623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정묘호란(1627년)때 후금 홍타이지가 3만명을 이끌고 원정나선지 10일만에 평양을 함락하자,인조는 다음날 강화도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다 주화론 즉,현실론을 내세우면서,항복했습니다.

    그 후,1636년 12월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홍타이지(청 태종:숭덕제)는 10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남한산성으로
    인조는 도망갔습니다.
    한달 반정도 버티다가 1617년 음력1월30일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는 항복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소현세자 부부 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이것을 '삼전의 굴욕'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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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보다 더 치욕스런 일을 당했는데도,권력을 잡은 서인은 이상한 궤변을 내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율곡 위패'논쟁입니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인조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서,실리외교 즉,실천론을 펼치던 군주인 광해군을 몰아낸 사건입니다.
    명분이야 광해군이 폐륜했다는 것이지만,실제는 양반들의 과두지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원이기론(서인)과 이원일기론(동인)을 단순히 철학논쟁으로 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는 군주를 상징하고,기는 신하(양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이원일기론(동인)은 군주인 왕을 중심으로 신하인 양반들이 정권을 이어가야한다는 것이고,
    이원이기론(서인)은 군주인 왕은 신하인 양반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정권을 이어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인 과 동인의 실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동인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실천론(북인)과 명분론(남인)으로 분화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서인(양반론),남인(군주론),북인(실체론)이라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서인은 율곡(이이)를 따르는 학파,남인은 퇴계(이황)을 따르는 학파,북인은 남명(조식)을 따르는 학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병자호란을 거치면서,서인들은 무능함이 철저히 드러납니다.
    양반이 지배해야 살기 좋아진다고 했는데,실제 결과는 청나라로 여성들이 끌러가고,전쟁 배상금으로 백성들도 힘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질로 끌러갔다고 돌아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북벌이 등장한 것입니다.
    남명정권이 대만의 정성공과 협력한 시기이기에 효종은 서인들을 견제하기하기 위해서,북인들을 지지한 것입니다.

    이때 권력에서 멀어지니,서인들은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라면서 '율곡위패' 논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한,예송논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병자호란이후 조선은 청나라 속국이 되어야 했기에,무능한 서인들은 외교만이 살길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17세기 청나라 정세에 따라서 각 파벌들의 환국이 등장합니다.그것은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했지만,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강희제 때 준가르 원정으로 중국을 통일하게 되자,조선은 서인의 일당독재로 흐르게 됩니다.
    즉,양반들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현재 이때 역사를 말하는 경향을 보면,실천론을 주장한 북인은 현재 별로 언급되질 않고,양반론을 주장한 서인 과 군주론을
    주장한 남인의 대결로 이분법으로 흐르더군요.

    그리고,과연 희빈 장씨(인동 장씨)는 나쁜여자고,인현왕후(여흥 민씨)는 착한여자일까요?

    제가 볼때 세도정치는 갑술환국(1694년)으로 장희빈이 폐위가 되면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영조의 탕평책은 서인일당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로 보입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벽파니 시파니 하는 것은 왕실 외척끼리 밥그릇 싸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19세기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나타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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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을 볼 때,현재 한국 정치권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지주 정당인 한민당이 뿌리인 민주당,친미외교론자 이승만의 자유당이 뿌리인 한나라당,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민주노동당,
    강남 우파의 짝퉁인 강남좌파를의 정당인 진보신당,반 NL파 노동자 정당인 사회당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들 각 정당의 장단점을 실제 행동중심으로 비교해주는 언론은 없더군요.

    그리고,역사 논쟁은 결국 정치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주류정치인들이 친일파 아니면 친미파 이기에 이데올로기 또한 그쪽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들은 국민들 생각은 별로 중요치 않고,그저 강대국의 정세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백범 2011/07/14 17:40 #

    송시열과 생각이 다르다, 송시열이 강경론을 주장한다 하여 먼저 송시열을 죽이자고 들고 일어난 남인들의 행동도 그다지 감싸주고 싶은 마음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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