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친일파로 규정한 폭거...(펌) 박정희

뭔 친일인명사전편찬위란 것들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자칭 양식있는 학자들이란 것이 정치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짓거리도 유감없이 펼치고 있다.

이제는 박정희의 혈서가 나왔다는 자료를 은근슬쩍 언론에 흘려 대면서 악을 쓰고 있다.

 

이제 11월 8일에 그를 친일파로 끼워 넣기 위해 사전여론을 조성하려는 것인데, 그 어떤 뻔뻔하던 정치꾼의 행태도 넘어서고 있다.

 

저들이 박정희를 친일파로 딱지붙이는 짓거리는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박정희는 해방 당시에는 친일파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해방당시만큼 친일파 규정에 대해 정확하게 밝힐 수 있었던 시점이 어디에 있나.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친일파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당시 남한에서 친일파를 분류하는 법령은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있었다. 북한은 1946년의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남북한 그 어떤 기준에 의하더라도 박정희는 친일파로 분류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신기남의 아버지같은 하사관 이상의 헌병이나 김희선의 아버지같은 고등경찰은 그 어떤 기준에 의하더라도 당연 친일파였다. 북한도 남한도 그렇게 규정했다.

http://blog.daum.net/ikdominia/36

 

둘째, 저 위원회는 형평성에서 완전히 균형을 잃은 집단이다.


저들은 노무현정부시절 노무현이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는 말을 한 직후에 조직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2004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오마이뉴스>의 네티즌들의 모금활동으로 그 자금줄의 명맥을 유지한 단체이다. <행동하는 앙심>들의 돈을 받아 먹었으니 결코 정치적인 편향성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해방당시는 헌병이나 헌병보, 고등경찰 출신은 행적을 불문하고 무조건의 친일파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군인, 장교는 달랐다. 일반군인은 장교일지라도 악질적 반민족 행위가 없으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 단체는 처음에 해방 직후의 이러한 기준과도 완전히 어긋나게 신기남의 아버지와 김희선의 아버지는 명단에서 빼겠다고 했다. 악명 높은 겐뻬이 고쵸(헌병 오장) 신기남의 아버지를 조사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선언하고 만주특무, 즉 고등경찰이었던 김희선의 아버지마저 친일파의 명단에서 제외해 그 편향성의 극치를 유감 없이 드러냈다.

 

이들은 친일의 근거가 부족하다거나 계급이 장교가 아니지만 박정희는 선생 노릇 잘 해 먹고 살다가 자발적으로 장교가 되었다는 둥 별 말같잖은 이유를 다 갖다 붙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선생노릇 하다 헌병이 된 신기남의 아버지 시게미쓰 쿠니오가 훈련병 시절에 썼던, 너무나 친일적이어서 당시 잡지 삼천리에까지 소개되었던 훈련병 일기(http://blog.daum.net/ikdominia/37) 같은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자료이다. 위원회는 이런 자료를 애써 무시하는 어이없는 작태를 보였다.

 

셋째, 저들은 순수한 학술단체가 아니라 박정희에 원한이 사무친 인물들이다.

이들이 박정희를 평가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인 것이다.

 

인명사전편찬위가 소속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최고위층의 면면을 좀 보자.

먼저 연구소 소장 임헌영이란 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1974년과 1979년 2차에 걸쳐 투옥된 경력이 있고 10년 전인 1998년에야 복권된 인물이다. 박정희라면 이를 갈 수밖에 사람이다.

 

이사장 김병상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 때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인천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대책위원장 역할을 하며 노동운동과 박정희 반대운동을 하던 인물이다. 임헌영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것이 없는 자이다.

 

명예 이사장 이돈명은 1974년 4월의 민청학련 사건 이후 반 박정희운동을 하면서 1970, 80년대 인권운동을 하고 한울회, 전민학련, 전민노련 사건 등에서 변호사로 활약했었다. 그는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의 변호사까지 맡았던 사람이다.

 

이들의 면면이라 게 어쩌면 한결같이 이러하다.

이런 자들이 모여 앉아서 해방 당시에는 친일파라고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박정희를 반민족이라고 몰아 대고 자빠졌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넷째, 박정희는 그 어떠한 반민족의 행태도 한 적이 없다.

그가 무슨 혈서를 썼다는데, 원본은 공개되지 않는 이따위가 무슨 반민족 악행의 근거가 되나.

 

박정희는 1944년 7월 1일 만주의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해방까지 불과 1년 1개월 근무했지만 그 기간에 그 어떤 반민족적 행위도 한 바가 없다. 이에 대해 그 어떠한 증명된 자료도 없다. 그가 독립군을 수 없이 토벌했다는 둥 천하에 말도 안되는 헛소리는 그의 반대파들에 의해 수없이 떠돌지만 그에 대한 이렇다 할 근거를 제시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이런 증거들은 많이 있다.

박정희 까는데 혈안이 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정운현이란 자의 <군인 박정희> 78페이지 이하를 보면 박정희가 장교가 되어 고향에 돌아와서 그가 선생이던 시절 괴롭히던 일본인 교장, 군수, 서장을 불러 혼을 내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통쾌해 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주재소의 오가와 순사를 불러 그를 혼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정운현마저 박정희가 실제로 이랬던 것은 사실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그는 같은 책 99페이지 이하에서 박정희가 연대 을종부관이어서 만주에 부임한 후 팔로군토벌에 전혀 참여한 적이 없다는 조선인 선배 신현준, 방원철의 증언을 싸그리 무시하고 그 무슨 중국인의 증언이라며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아니지만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본다는 되도 않은 억측을 하고 있다.

 

결국 증거가 잘 안나오니 그가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어 간 자체가 친일이라며 결국 어거지로 우겨 대는 웃기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박정희가 팔로군이나 독립군을 토벌한 증거는 전혀 없다.

 

그 어떤 반민족적 행태도 없고 오직 세계 최빈국을 10개 경제대국으로 올려 놓은 민족적 영웅 민족을 박정희를 반민족이라 딱지붙이지 못해 안달하는 짓거리를 저 추한 단체따위가 저질러 대고 있다.

 

 

다섯째, 당시 친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친일 논의는 완전한 오류투성이에 불과하다.

 

지금과 해방 당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떤 점이 다른가.

국가건설에 필요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이다.

 

일제시대 조선민중의 문맹율은 1920년대 99%, 30년대도 80% 정도에 이르는 말도 안되는 수치였다. 이점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기사, 또는 총독부의 조사 자료 등 분명한 자료로 확인된다.

http://blog.daum.net/ikdominia/38

 

이런 사정은 해방당시까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이러다 보니 1950년 625가 터지니 조국의 운명을 걸머진 육해공군 총 사령관에 1917년생인 겨우 33세 정일권이 임명되는 참담한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런 형편이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국민으로 할 수 있는 건국 사업이란 게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인으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자체는, 그가 특히 반민족적인 행태가 없다면 국가건설에 동원할 더없이 중요한 자원이었다.

 

친일 논의하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당시 북한의 형편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북한에서 흡수한 대표적인 일본군 출신이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을 지낸 이활이다.

 

황장엽은 김영주가 일본군의 관동군에서 복무한 경력을 증언했고, 이활은 일본 제국 공군사관학교인 <나고야 공군학교>의 정예 출신으로서 수많은 기록적 비행경력을 남기고 나중에 북한의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까지 된 인물이다. 이활은 평북 염주 출생인데 북한의 1995년판 조선대백과사전은 그가 "어느 외국"의 비행학교를 졸업했다고만 소개한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의 나고야 공군학교를 의미하는 것임은 모르는 자가 없다.

 

이활은 1995년 10월 공화국 영웅칭호까지 받은 인물이다. 김일성 또한 비행기를 몰아보기는 커녕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터에 건국에 이런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런 능력있는 인물을 함부로 친일파라 규정하지 않고 나중에는 북한 최고 영예인 공화국의 영웅의 칭호까지 추서하며 그가 북한 공군에 끼친 업적을 기렸던 것이다.

 

그 외에도 북한의 지배층에 친일여부가 거론되는 자가 매우 많다.

이활 이외에도 역시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으로서 인민군 사단장을 지낸 허민국, 강치우 등 뿐만 아니라 만선일보 편집부장인 발팔양이 노동신문 창간 발기인이었으며 일제하 광산지배인이었던 정준택이나 일제 함흥철도국장이었던 한희진 등도 김일성은 가리지 않고 썼다.

 

북한은 이들의 능력과 재능을 국가건설에 충분히 활용하고 그 업적이 클 경우에는 이활처럼 최고의 국가영웅인 공화국 영웅의 칭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에서 더 이상 친일파라 불리지 않는다. 그저 국가건설의 영웅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조국을 거지국가에서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끈 기적의 지도자를 짓밟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참으로 어이 없는 현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섯째, 다음 장준하의 글을 좀 보자.

 

장준하는 일본 유학시절 동경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군에 지원하라는 최남선과 이광수의 강연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해 일본군에 징병이 되었다가도 탈출하여 독립군이 되고 해방 후에는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사상계를 발행했으며 박정희가 일제의 초급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극렬한 대립노선을 걸었던 인물이다. 육당 최남선이라면 친일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열서까지 썼던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친일파이다.

 

그런 그가 최남선을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찬양하고 있다.

http://blog.daum.net/ikdominia/39

 

"우리는 이 해를 보내면서...뜻있는 모든 인사들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이 육당의 서거였다... 선생은 민족의 명영을 영원히 부지하려는 원대한 의도 밑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의 재흥을 위하여 발분망식하였으며, 항상 민족사상의 고취에 힘썼으며, "이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항상 우리와 더불어 있었고 우리의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어서 그러 하여 민족의 생명은 싹을 부지하고 겨레는 위안을 받고 희망을 갖추어 광복에 이른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사상계 1957년 12월호)

 

어느 민족의 태양에 대한 찬사도 저렇기는 어렵겠다.

그의 글 끝을 보면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와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결국 그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만한 인물, 저만한 역량을 가지고 대한민국 건국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 80%에 육박하던 문맹자 파고 속에서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나중에 문학에 대한 최남선의 공을 기려 그 문학상까지 제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흔히 친일청산을 운운하면서 독일에 점령되었던 프랑스의 예를 들먹이지만 냉정히 말해 프랑스와 당시 해방된 대한민국의 상황은 비교할 수가 없다. 프랑스는 2차대전에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마지노(Maginot)선이 무너지고 파리가 독일에 점령된 1940년 6월 15일 이후 겨우 4년만인 1944년 8월에 해방이 되었다. 우리의 36년 지배와는 차원이 달랐으며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당시 완전히 근대화된 국가였다. 문맹율이 80%에 이르고 갓쓰고 나귀타고 다니던 지구상 최악의 극빈국가와 현대적 무기를 생산하던 프랑스를 단순비교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굶어 죽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고, 전주예수병원에서는 기생충이 1063마리가 뱃속에 들어 죽은 여자애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일본군에 몸담았던 박정희가 집권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건 건국 당시의 우리 민족의 역량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인물이 너무나 없었던 당시의 여건을 무시하고는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친일이란 단어는 더 이상 정의나 민족정기를 추구하는 단어가 아니다.

한맺힌 소위 <행동하는 앙심>들이 대한민국 건설과 건국세력을 무작정 까대기 위한 추한 정치적 용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표면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소장이나 위원장, 명예 위원장이랍시고 나대는 임헌영, 임병상, 이돈명같은 위선적인 작자들이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기에 골몰하는 한 줌도 안되는 불순세력이 있지만, 더 문제는 그 근저에 뿌리박고 대한민국의 번영의 그늘에 기생하면서도 대한민국을 부정에만 혈안이 된 수백만 집단 세력, 다른 지역민과는 완전히 다른 정서로 움직이는 어느 지역의 집단 또라이들이 있다.

 

이들이 자랑스런 대한민국사를 온통 쓰레기통에 처박고 있다.

 

독립운동가 때려잡던 헌병 오장 신기남의 아버지는 친일사전에서 빼려 하지만 단순이 일본군 복무 경력만 가진 박정희는 그 대열에 넣지 못해 안달을 하는 더러운 세력이 있다.

 

조국을 세계 최빈국 거지국가에서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일으킨 민족적 영웅을 반민족으로 낙인 찍는 일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말도 아닌 것이다.

 

최소한의 형평성도 정의감도 없는 이따위 친일인명사전편찬이란 따위는 단호히 부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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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lvir27 : 이글루스의 정신병자 특집 3번째 백범 2010-08-26 23:11:48 #

    ... 공개되었다. 7월 20일 후의 글들을 살펴보자. 없다. 뭐가 없냐고? 혈서에 대한 반박글이 없다. 그저 펌질만 있다. http://baekbeom.egloos.com/3779248 그 펌질한 글의 요점 및 주장을 정리해보자 첫째, 박정희는 해방 당시에는 친일파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n ... more

  • 심슨 월드 : 적합성의 오류 - 무지에의 논증 외.. 2013-01-07 16:09:30 #

    ... ; (PD수첩, 1996. 1.)ex)http://baekbeom.egloos.com/3779248 백범"해방 당시는 .. 중략.. 국가건설에 필요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이다. ..중략.. 친일 논의하면 걸핏하면 들고 ... more

덧글

  • 에드워디안 2010/07/21 21:21 # 답글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숙청)을 들먹이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가소로울 따름입니다. 프랑스의 숙청도 실은 드골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한 면이 있지요. 억울하게 약식 처형당한 사람도 상당수라 하고... 독일의 경우도 나치 청산을 철저히 한 걸로 착각하는데 재계 인사들은 거의 무죄 방면되었고, 나치당원이자 친위대 대원이었던 사람이 서독 대통령을 역임했을 정도로 '청산'이 불철저 했다네요. 동독에서도 괴링을 보필한 프로이센 경관들이 공산당에 입당해 경시청을 장악했고...
  • 에드워디안 2010/07/21 21:30 # 답글

    김구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죠? 조선에 있던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그런 자들의 후손들이 '친일청산'을 한다고라?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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