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글 한 토막을 소개한다. 꼼꼼히 읽어 보기 바란다. 다 읽고 나면 누가 쓴 글인지를 묻겠다.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帝國)이 존망(存亡)을 가지고 싸우는 이 일전(一戰)의 여하(如何)에 따라서 좌우되며,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이기지 않으면 안되며, 물론 완성할 것이라 확신하다. (중략) 이 승리는 10억의 생(生)과 사(死)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기 보다도 유구한 삼천년의 역사와 영예를 위해, 또한 동아(東亞) 전체를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이 일대결전(一大決戰)은 동아(東亞)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세계는 바다와 땅을 세우고 있는데 청년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다. 피를 흘리며, 묵숨을 걸어….”
자, 이제 누가 쓴 글인지 짐작이 가는가? 이 글은 1943년 경성일보에 실린 <반도 이천오백만 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일제학병 권유격문’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지난 3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된 몽양 여운형이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운형의 격문은 1944년 경성일보가 발간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도 실렸다.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여운형 추모사업회는 “1943년 일본인 기자의 날조로 경성일보에 학병 권유 담화가 실렸을 뿐이다”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몽양의 경우는 일회성의 글인데다가 일제 말년에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있어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시켰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학병권유 격문을 썼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몽양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격동의 역사를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의 삶을 좀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역사청산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조선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조선백성으로 살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당혹스럽게 찾아온 운명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일본제국의 관료로, 군인으로, 경찰로, 교사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일본제국의 학생이었고, 상인이었고, 농민이었고, 노동자였다. 박정희는 일본제국의 군인이었고, 여운형은 일본제국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다.
조선백성으로 살다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사는 것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나라잃은 설움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일본제국 국민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36년 동안 묵묵히 그렇게 살았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3090명의 친일인사를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능동적 친일과 강제적 친일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미 100년이 지난 일들에 대해 그 누가 자신있게 진실을 밝힐 수 있겠는가? 여운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친일이라는 잣대 앞에서 무결점이 가능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회화에서는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좀더 흐리고 작게 그려서 보다 현실에 가깝게 만드는 원근법이 있다. 역사도 원근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과거의 일 일수록 구체적인 대목은 단정하기 어렵고 조금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명백히 인정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전쟁 패배로 해방을 맞이했다. 스스로 이룬 해방이 아니었다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적어도 한국은 국가를 건설하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 결과 세계가 인정할 만큼 눈부신 성공의 역사를 창조했다.
모두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숨죽이며 살아온 과거를 뻔히 알면서 서로서로 ‘죄’의 무게를 저울질 하며 ‘과거청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제국 시절에 얻은 지식과 기술, 경험을 건국과 사회발전에 적극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동반자 관계로 바꾸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단결과 협력을 통해 발전과 번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슬기롭고 정직한 역사청산임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과거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건강한 미래 건설에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살아온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힘겹게 견뎌내고 결국 발전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받아야 할 것은 ‘단죄’의 칼날이 아니라 애정과 화해, 그리고 협력의 손길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슬기롭게 잘해왔다. 이제 와서 느닷없이 ‘과거청산’을 꺼내놓는 사람들의 의도가 의심스럽고 그 결과가 걱정스럽다.
이광백(dailynk 논설위원, 시대정신 편집장)
“대동아(大東亞)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帝國)이 존망(存亡)을 가지고 싸우는 이 일전(一戰)의 여하(如何)에 따라서 좌우되며,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이기지 않으면 안되며, 물론 완성할 것이라 확신하다. (중략) 이 승리는 10억의 생(生)과 사(死)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기 보다도 유구한 삼천년의 역사와 영예를 위해, 또한 동아(東亞) 전체를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이 일대결전(一大決戰)은 동아(東亞)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세계는 바다와 땅을 세우고 있는데 청년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다. 피를 흘리며, 묵숨을 걸어….”
자, 이제 누가 쓴 글인지 짐작이 가는가? 이 글은 1943년 경성일보에 실린 <반도 이천오백만 동포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일제학병 권유격문’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지난 3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된 몽양 여운형이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운형의 격문은 1944년 경성일보가 발간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도 실렸다.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여운형 추모사업회는 “1943년 일본인 기자의 날조로 경성일보에 학병 권유 담화가 실렸을 뿐이다”고 해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몽양의 경우는 일회성의 글인데다가 일제 말년에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있어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시켰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학병권유 격문을 썼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몽양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격동의 역사를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의 삶을 좀더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역사청산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조선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조선백성으로 살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당혹스럽게 찾아온 운명을 거역할 힘이 없었다. 일본제국의 관료로, 군인으로, 경찰로, 교사로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일본제국의 학생이었고, 상인이었고, 농민이었고, 노동자였다. 박정희는 일본제국의 군인이었고, 여운형은 일본제국의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다.
조선백성으로 살다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사는 것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나라잃은 설움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일본제국 국민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36년 동안 묵묵히 그렇게 살았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그렇게 살았다.
3090명의 친일인사를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능동적 친일과 강제적 친일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미 100년이 지난 일들에 대해 그 누가 자신있게 진실을 밝힐 수 있겠는가? 여운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친일이라는 잣대 앞에서 무결점이 가능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회화에서는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좀더 흐리고 작게 그려서 보다 현실에 가깝게 만드는 원근법이 있다. 역사도 원근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과거의 일 일수록 구체적인 대목은 단정하기 어렵고 조금은 흐릿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명백히 인정해야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전쟁 패배로 해방을 맞이했다. 스스로 이룬 해방이 아니었다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적어도 한국은 국가를 건설하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매진했다. 그 결과 세계가 인정할 만큼 눈부신 성공의 역사를 창조했다.
모두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숨죽이며 살아온 과거를 뻔히 알면서 서로서로 ‘죄’의 무게를 저울질 하며 ‘과거청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제국 시절에 얻은 지식과 기술, 경험을 건국과 사회발전에 적극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동반자 관계로 바꾸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단결과 협력을 통해 발전과 번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슬기롭고 정직한 역사청산임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과거청산의 궁극적 목적은 건강한 미래 건설에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살아온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힘겹게 견뎌내고 결국 발전과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받아야 할 것은 ‘단죄’의 칼날이 아니라 애정과 화해, 그리고 협력의 손길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슬기롭게 잘해왔다. 이제 와서 느닷없이 ‘과거청산’을 꺼내놓는 사람들의 의도가 의심스럽고 그 결과가 걱정스럽다.
이광백(dailynk 논설위원, 시대정신 편집장)
덧글
organizer™ 2009/11/13 02:11 # 답글
푸하하하하
>> 일본인 기자의 날조로
대일본 제국의 기자가 감히 "날조"를 행하다니............. 천황 폐하께 누를 끼친 놈이구만.
꿈에서 봤어 2009/11/13 08:46 # 삭제 답글
악어의눈물 2009/11/13 12:52 # 답글
친일파로 등재된 김동인이가 여운형의 몰빵으로 친일하는 작태에 보고 " 순 호로새끼"
라고 욕을 했겟습니까
민족연구소 놈들아 일회성 좋아 하지마라, 내가 아는것만 해도 몇개 되는데 보여주면
뭐라고 나불 거릴지 궁금 합니다
백범 2009/11/14 13:41 #
유xx 이 개새끼는 아예 자기 학과 동창생을 데려다가 물고문, 전기고문했고, 동의대 사건은 학생들이 전경 2명을 먼저 납치살해한 뒤, 구하러 온 나머지 7명인가 6명의 전경을 사살한 사건입니다. 광주사태는 계엄군이나 공수가 먼저 공격한게 아니라 시민군이 먼저 공격했더군요...